아티클

[결정적 5년, 마지막 성장판을 열자①-2] 독일·스위스 50대 혁신기업 심층취재

기획·취재팀 | 2014.01.01 06:00

편집자주 |  다수 전문가들은 앞으로 5년을 우리나라의 '성장판'이 열려있는 마지막 시기로 보고 있다. 이 '마지막 5년' 동안 우리나라의 성장동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은 기업들의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혁신'없이는 불가능하다. 이에 머니투데이는 국내 기업들에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혁신 전략을 찾기 위해 혁신에 성공한 독일 중견기업(미텔슈탄트)을 비롯한 유럽, 미국, 일본 등 전세계 100대 기업을 심층 취재, 분석한다. 현지에서 이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을 비롯한 고위 임원들을 만나 깊이있는 경험을 끌어내고 한국 기업에 활용할 수 있는 혁신의 '정수'(精髓)를 뽑아낼 예정이다. 산업연구원, IBK기업은행경제연구소, 독일 드로기그룹, 롤랜드버거 스트래티지 컨설턴츠 등과 공동연구를 통해 한국기업들을 위한 '혁신의 황금법칙'도 찾아내 제시할 계획이다.
image
"'창조'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혁신'이란 새로운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테오도르 레빗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히든챔피언'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중견기업들에 대한 오해들이 있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보수적이고 기술지향적인 기업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머니투데이가 독일·스위스 등 50대 대표 중견기업(미텔슈탄트·Mittelstand) 최고경영자(CEO)들과 직접 인터뷰하고 심층 취재한 결과는 달랐다.

신중하고 보수적인 것으로 알려졌던 독일 등의 중견기업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적응력과 대응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 기업이 '창조경제'의 개념에 관념적으로 천착하고 있는 사이 이들은 기존 시장을 더 강하게 움켜쥐는 동시에 새로운 시장으로 확장하기 위해 조용하지만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image

image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기 위해 '혁신의 일상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밸류스틱'(Value stick) 상의 위쪽에 해당하는 '수요'와 아래쪽의 '비용' 2가지 방향 모두에서 혁신을 지향하고 실행하고 있었다. 이른바 '수요 혁신', 그리고 '공정 및 공급망 혁신'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기업들은 장기적인 차원에서 밸류스틱 상 2가지 방향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방향키를 맞춰 왔다. 하나는 제품 경쟁력을 개선해 고객의 '지불 용의 최고가격'(WTP·Willingness to pay)을 높인 뒤 가격을 끌어올리는 '수요의 혁신'이다. 다른 하나는 공급망 혁신 등을 통해 협력업체들의 '납품 용의 최저가격'(WTS·Willingness to supply)을 낮춘 뒤 구매 가격을 조정하는 공급망 혁신 또는 총비용을 최대한 WTS에 가깝게 줄이는 '공정 혁신'이다. 전통적인 경영 전략 이론들은 이들 2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권해왔다.

그러나 독일·스위스 50대 혁신 중견기업들은 달랐다. 이혁수 롤랜드버거 스트래티지 컨설턴츠 코리아 부사장은 "수요 창출 측면의 차별화와 원가절감 측면의 차별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은 실행 자체가 어려워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지만 최근 독일 혁신 중견기업들은 불확실성을 돌파하기 위해 이를 과감하게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의 미래를 스스로 창조하는 '수요 혁신'

수요 혁신은 '디맨드'(Demand)의 저자 에이드리언 슬라이워츠키 올리버와이먼 파트너가 처음 주창한 개념이다. 그는 "현대 기업은 고객의 지불용의 가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객의 미래에 대한 통찰까지 담아 최상위 수요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B2B(기업간 거래) 기업의 경우 전방산업 고객의 변화까지 고려해 실제 고객사의 전체 비즈니스모델과 가치사슬(밸류체인) 메커니즘에 대해 이해하고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실제로 B2B형 제조업이 많은 독일·스위스 혁신기업들에서는 이 같은 수요 혁신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문제해결(솔루션)의 차별화 △브랜드 스토리 강화 △빅데이터에 기반한 정밀한 시장대응 △내부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혁 혁신)을 통한 미래형 프리미엄 제품·서비스 제공 등의 세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솔루션 차별화는 B2B형 독일 중견기업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진 혁신 실행의 징표다. 이들은 고객사의 성과창출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기존에 제공하던 제품과 서비스에서 벗어나 고객사를 근원적으로 도울 수 있는 '솔루션'(문제해결책)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사업 자체를 '재정의'한 것이다. 기술 지원 방식의 사후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고객사의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업'(業) 자체를 바꿔나가는 것이다. 그 결과, 고객사와의 신뢰는 강화됐고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는 증대됐다.

예컨대 전세계 안전밸브 시장의 1인자인 '레저'(Leser)나 프로세스 밸브 분야의 강자인 '아리-아르마투렌'(Ari-armaturen)은 고부가가치 밸브시장의 수요 업체인 플랜트 엔지니어링 디벨로퍼에 단순히 밸브 제품 뿐 아니라 종합적인 시스템을 제공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레저의 경우 밸브 시스템 엔지니어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체 설계 과정에 참여해 컨설팅을 제공하는 '업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브랜드 스토리 강화는 B2C(기업-소비자간 거래) 기업은 물론 B2B 기업에서도 발견된다. 필기구 생산업체인 '스태들러'(Staedlter)는 최근 자사의 200년 역사를 담은 인형 캐릭터를 제품에 새겨 넣었다. 스태들러를 사용하며 성장한 세대에는 이 캐릭터를 통해 브랜드를 다시금 각인시키고, 동시에 이들의 자녀들인 모바일 세대에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통해 필기구 사용을 촉발시키려는 의도다. 더불어 색연필 사용과 결합된 교육용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어 모바일 시대에 대비하고 있다.

또 독일의 100년된 전통 중견기업들 중에도 '빅데이터'와 같은 첨단기법을 활용하는 곳이 적지 않다. 침구류 시장의 히든챔피언인 '빌러벡'(Billerbeck)은 1921년 창업 이후 지금까지 100년 가까이 축적한 소비자 데이터를 통해 시장에 혁신제품을 내놓는 정확한 시점을 찾아낸다. 정확한 시장 진출로 거둔 수익은 다시 제품 혁신에 투자한다.

◇협력업체와의 공존 생태계 '공정 및 공급망 혁신'

공정 혁신은 협력업체에 주는 납품단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비용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구체적으로는 △제품의 모듈화를 위한 공정 재설계 △고객맞춤형 유연생산시스템으로의 전환 △연구·개발(R&D) 프로세스 혁신 등이 있다.

제품의 모듈화는 적은 비용으로도 고객에게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막대한 추가 투자 없이 고객사에 솔루션을 제공하려면 제품을 표준화된 작은 모듈로 만들 필요가 있다. 마치 레고처럼 표준화된 블록으로 유연하게 모든 장난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자동차·비행기 페인팅 시스템을 제공하는 '뒤르'(Durr)의 경우 다양한 차종·기종에 맞춰 페인팅 프로세스를 제공하기 위해 표준화된 블록을 조립해 최종 시스템을 제조·납품하는 방식으로 사업 모델을 바꿨다. 시스템 라인의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라인의 복잡성은 자원과 노동력의 낭비를 불러온다. 뒤르는 이 같은 공정 혁신을 통해 완성품 업체들과 수평적 협력관계까지 이뤄냈다.

또 고객맞춤형 유연생산시스템은 '원가절감'과 '품질경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세계 최고의 레이저 절삭기 제조업체 '트럼프'(Trumpf)는 2000년대 중반 도요타의 '카이젠'(改善) 시스템을 도입해 기존의 생산방식을 버리고 고객수요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프로세스로 바꿨다. 이 회사는 혁신적 경영활동을 지식 매뉴얼로 만들어 '싱크로'(Synchro)라는 이름을 붙이고 20명의 컨설턴트까지 둔 컨설팅 비즈니스까지 벌이고 있다.

R&D 프로세스의 혁신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스위스 등의 중견기업들은 단순히 고급 기술이 아니라 반드시 상업화가 가능하고, 수요 혁신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흔히 독일 히든챔피언 또는 중견기업에 대해 매출의 10%가 넘는 R&D 투자 비중을 거론하지만, 실제 중요한 것은 투자비 규모가 아닌 R&D의 상업화 프로세스다. 이들의 R&D는 항상 시장 동향 및 시장 전망과 긴밀히 연계돼 있어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큰 기술 중심으로 이뤄진다. 연구 인력과 마케팅 인력, 생산 인력 간의 개방적인 소통 구조도 큰 강점이다.

한편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공급망 혁신도 간과할 수 없다. 독일·스위스의 혁신 중견기업들은 협력업체들을 자신들의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시켜 하나의 팀으로 간주하고 적극 협업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무조건 구매 원가를 절감하려 하기보다는 협력업체들이 장기적으로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공급망을 설계한다. 이는 공급자-수요자 간의 탄탄한 신뢰로 이어지고, 이 신뢰는 품질이 보장된 원가 경쟁력 향상으로 다시 연결진다. 보장된 품질은 또 다시 수요 혁신과 함께 고객 로열티에도 영향을 미친다.

독일 중견기업들의 이 같은 수요기업과 협력업체 간의 협업은 '사회적 협업'의 하나의 사례다. 최근 독일 중견기업들에 대해 집대성한 책을 펴낸 랄프 래식 롤랜드버거 파트너는 "독일은 혁신적 기업들 간의 협력을 통해 산업 생산의 글로벌 표준화를 이루고자 노력한다"며 "이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생산의 표준화와 제품과 기술의 표준화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협업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함께 선점하려는 것이다.

최근 독일 정부가 주도하고 각 혁신기업들이 워킹그룹으로 참여해 실용적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는 '인더스트리 4.0' 연구도 이 같은 협업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를 통해 표준 개발 단계에서부터 정부의 조정능력이 발휘되고 정확한 자원 배분과 산업계의 협조가 이뤄진다.

특히 독일의 연방정부와 지방정부는 미래 유망 산업 가운데 시장화가 부진한 분야에 대해 이종(異種) 산업 간 협력을 장려해 시장화를 유도한다. 최근 독일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신재생 에너지 발전 분야도 독일 정부와 관련 업계가 독일 고유의 협력과 공조가 강점을 발휘한 사례다.

◇생존을 위한 대안은 혁신 유전자 'A·B·C'

요약하면 독일 등의 혁신 중견기업들은 선진적인 문화와 경영 프로세스 등을 바탕으로 상시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기업모델 혁신, 수익모델 혁신, 산업모델 혁신이다.

독일·스위스 등의 중견기업들은 이 가운데 기업의 역할 또는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기업모델 혁신에 집중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 파는 전통적인 '제조업' 모델이었다면 지금은 '고객중심 사업'(customer driven operation) 모델로 변모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수요 혁신을 통해 높은 품질과 적절한 가격 외에도 자신들 만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얹은 새로운 '가치제안'을 내놓고 있다. '토털 솔루션 제공'이 바로 그 예다. 또 대 고객 채널에서는 영업사원이 아닌 엔지니어 등의 컨설턴트형 직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동시에 공정 혁신으로 비용을 최소화하고, 공급망 혁신으로 협력업체 등과의 핵심 파트너십을 강화해 '신뢰의 순환'을 꾀하고 있다.

수요와 비용 측면에서의 끊임없는 혁신은 그를 위한 '조직문화'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중견기업 등에 대한 전략 컨설팅과 장기 투자를 병행하는 독일 드로기그룹이 머니투데이와 253개 독일 중견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연구를 실시한 결과, 혁신에 성공한 기업들의 조직문화에는 3가지 공통된 핵심 DNA, 이른바 '혁신의 A·B·C'가 있었다

첫째는 '민첩한 대응'(A·Agility), 둘째는 '대담한 실행'(B·Boldness), 마지막은 '투명한 소통'(C·Clarity)이다.

우선 빠른 의사결정 구조와 유연한 조직 문화를 통해 민첩한 실행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또 일부 위험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결단을 통해 의사결정을 내리고, 지속적으로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끝으로 때로는 인간적인 불편함이 있더라도 솔직하고 명확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필요가 있다.

독일에서 중견기업들을 대상으로 법률 자문과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는 마르틴 소르그 변호사는 "강한 중견기업들의 공통적 특징은 유연한 기업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원칙은 전혀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지켜나가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성장엔진'에 다시금 불을 지필 수 있는 해법을 찾기 위한 머니투데이의 글로벌 혁신기업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취재 및 연구 결과는 오는 4월 '2014 키플랫폼' 이전까지 차례로 공개될 예정이다.

☞ 2014 머니투데이 신년기획 '리프레임 코리아' 바로가기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