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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 연설의 한 대목. 대통령의 연설은 보통 경제와 민생을 강조하는데 윤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자유'가 키워드였다. 정치는 단 2번, 경제는 5번 언급한 반면 자유는 35번이나 외쳤다. '자유'는 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첫 연설을 통해 밝힌 국정운영 철학이었다.
윤 대통령은 최근 첫 해외순방에서도 다른 나라 정상들에게 이 철학을 표명했다. 지난 29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에서 "자유와 평화는 국제사회와의 연대에 의해 보장된다. 우리의 협력 관계가 보편가치와 규범의 초석이 되길 기대한다"고 연설했다. 이처럼 연설은 현대정치에서 대통령 등 국가수반이 국정운영의 철학과 비전, 정책의 기조 등을 국민에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통치자의 자격 여부는 대부분 공동체의 문제해결 능력에 달려 있는데, 연설은 현재 우리의 상태가 어떻고, 문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정치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이면서 현실 정치에도 참여하고 있는 신철희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사진)이 오랜 기간 '연설' 자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연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꼽은 것이 이같은 '현실 당면 문제 해결에 대한 기여'다. 신 선임연구원은 "정치인의 연설은 공동체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며 "청중은 이런 연설을 듣고,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평가하면서 직접 정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 선임연구원 본인도 연설 경험이 많다. 2018년 지방선거 때 고향인 경기도 여주시 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30대 때인 2004년부터 오랜 기간 여러 차례 선거에 도전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시카고대학교 석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주·양평 지역의 정책 대안을 개발하는 여양한강문화연구소도 설립했다. 지난 6·1 지방선거 때는 김동연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 캠프 정무실 선임부실장을 맡아 김 지사의 당선을 도왔다.
우리에게 2022년은 연설을 매우 자주 들었던 해다. 3월 대통령 선거, 6월 지방선거·국회의원재보궐선거로 반년 내내 유세 연설을 들었다. 연설 자체에 대한 상당히 드문 연구로 2015년 <민주주의와 정치인의 공적연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신 선임연구원을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이 만나 현대정치에서 연설이 갖는 의미와 좋은 연설은 어떤 연설인지, 우리는 어떻게 연설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들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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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18일 '100만 군중'이 운집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시 대선 유세 '장충단 공원 연설' /사진=김대중도서관 |
▶공동체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잘 이해한 연설이다. 공동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역할, 그리고 세계와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연설이다. 청중들도 '당신이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있다는데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어디 한 번 말해 보시오. 우리가 들어보고 판단할테니' 이런 심정으로 연설을 듣는다.
지난해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 때 부울경(부산·울산·경남) 합동연설회에서 당시 이준석 후보는 경쟁 후보가 "박근혜 석방"을 외친 반면 부울경의 고민은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이야 한다며 경제와 일자리를 강조했다. 지역 경제를 얘기할 때 정치인들은 대부분 선심성 사업을 꺼내드는데, 이 후보는 데이터산업 유치라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해결 대안을 제시했다. 대구나 광주, 지역마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정확히 포착했다. 이런 점이 이준석 돌풍의 동력이 됐다. 대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정당했다며 정면돌파한 연설도 뛰어났다. (아래 연설 인용글 참고)
여러분들이 탄핵에 대한 다른 생각과 공존할 수 있다면 경선 주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인정해 주십쇼. 그들을 과거 속에 묶어 두려고 하지 말아 주십쇼. 대구·경북이 이번 전당대회에서 보수혁신과 돌풍의 진원지임을 세상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한표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쇼.
-대통령, 국회의원 등 우리는 매일 같이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고 있다. 이들에게 좋은 연설의 기준을 제시해 준다면.
▶민주주의에서 가치는 그 실현을 위해 행동이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말을 통해서 선포돼야 한다. 따라서 정치인의 연설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연설은 논쟁적이라는 성격이 정치와 똑같다. 연설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정치 행위를 언어로도 잘 구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연설에 자신의 영혼을 담고 삶을 녹여 공동체의 미래를 제시하며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연설을 참 잘하는 것 같다. 한국 정치인들과 비교된다. 어떤 점이 다르기 때문일까.
▶정치인은 준비돼야 한다. 연설도 준비돼야 잘할 수 있다. 미국은 어렸을 때부터 스피치를 훈련한다. 교육 과정에 스피치가 일상화돼 있다. 일본은 우리 생각엔 청년들이 좀 패기 없어 보이지만, 우수 대학교의 엘리트 교육 과정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주장을 매우 적극적으로 잘 표현하는데, 스스로 일본을 이끌어 나갈 미래 리더라고 여겨 그렇다.
예전에 메이저리거 박찬호도 미국에서 놀랐던 게 현지 선수들의 야구 실력이 아니라 리더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구단들과 선수노조 간 갈등이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박찬호는 팀내 리더급 선수들이 자신의 주장을 정확하고 적극적으로 발언했던 게 놀라웠다고 한다. 미국은 정치인이 아니라도 리더가 되려면 연설 능력을 준비해 갖춰야 한다. 운동선수도 운동만 하는 게 아니라 사회 현안을 항상 잘 이해하고 있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말할 줄 안다.
-연설, 즉 말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말을 잘하려면 부지런히 학습해야 한다. 종합적인 지식을 갖춰야 한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웅변가인 키케로는 이상적인 연설가는 철학, 윤리학, 심리학, 정치학을 비롯해 물리학, 변증법에 대한 지식 등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다. 법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정감에도 통달해야 하며, 감정을 자극하는데 능숙하고, 유머도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했다. 지식과 학습은 좋은 연설가의 조건이고, 곧 리더가 갖춰야 할 능력이다.
한국은 연설 능력도 리더십도 준비되지 않은 리더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민주주의의 수준은 정치인들 말의 수준과 비례한다는데 우리 정치권에선 막말과 저질스러운 말, 비꼬는 말들만 난무한다. 정치인의 말에서 감동을 받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래도 우리도 뛰어난 연설가들이 있지 않았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훌륭한 연설가일 것이다. 김대중이 40대 때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1960~1970년대에 정가에선 이런 유행어가 있었다. 정치인들끼리 바둑을 두다가 패색이 확연한데도 돌을 던지지 않는 상대에게, 시간이 없으니 빨리 돌을 던지라는 뜻으로 "김대중 연설 들으러 갈 시간 됐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1964년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도 유명하지 않나. 동료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저지하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해 기록을 세웠다. 그것도 원고 없이 한 연설이었다. 단지 시간을 보내려는 것이 아닌,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연설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어떻게 그렇게 연설을 잘할 수 있었을까.
▶김 전 대통령의 탁월한 연설은 엄청난 독서량에 기반한다. 수감되거나 연금될 때 책을 많이 봤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야당의원 시절 날치기 저지 등을 위해 회의장 점거 시위를 할 때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항상 책을 봤다고 한다. 연설을 잘하려면 풍부한 독서량과 일상적인 사색이 토대가 돼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의 연설이 또 훌륭한 점은 대중적인 언어로 한다는 것이다. 1969년 효창운동장에서의 3선 개헌 반대 연설. 황소 이야기의 해학으로 시작해 대중들과 친근하게 소통한 명연설이었다. (아래 연설 인용글 참고)
지난 6월 28일자 조간신문을 보니까 경기도 안성에서 황소 한마리가 미쳐 가지고 주인 내외간을 마구 찔러서 중상을 입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황소를 때려잡을라고 몽둥이를 들고 나섰지만 잡지 못해서 마침내 지서 순경이 와 가지고 칼빈 총을 다섯방이나 쏘아서 기어이 때려 잡았어. 나는 이 신문을 보고 과연 천도가 무심치 않구나 이래 생각했어. 왜? 대한민국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한 공화당이 지금 미쳐 가지고 국민 주권을 때려 잡은 3선 개헌의 음모를 하니까, 미물 짐승인 황소까지 같이 미쳐서 주인한테 달려든 것이다, 이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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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30일 오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광주·전북·전남·제주 합동연설회에서 이준석 당대표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2021.5.30/뉴스1 |
▶2015년,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의 신임 원내대표 유승민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합시다'가 생각난다. 내용도 훌륭했고, 당시 연설 자체로 엄청난 정치적 여파를 불러왔다. 이 연설은 반대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야당으로부터, 그리고 진보 성향의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칭찬을 받았다. 세월호, 노무현에 대한 평가, 복지 정책 등 그때까지 보수진영이 언급하거나 다루기 껄끄러워 했던 이슈들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줬고, 그동안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도 인정하는 낮은 자세를 취했다.
당시 유 대표는 여당 내에 몇 안되는 정책통이었지만 대중적 인기는 별로 없었는데 이 연설 하나로 차기 대선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이 연설은 정치인의 공적연설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계기도 됐다. (아래 연설 인용글 참고)
새누리당은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겠습니다.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습니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를 말했습니다. 양극화 해소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던 그분의 통찰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어제의 새누리당이 경제성장과 자유시장경제에 치우친 정당이었다면, 오늘의 이 변화를 통하여 내일의 새누리당은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정당이 되겠습니다.
-또다른 명연설을 소개해 준다면.
▶미국 쪽을 소개해주겠다. 바버라 조던. 미국 흑인 여성 하원의원이다. 1974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졌던 워터게이트 청문회 연설, 1976년 그의 민주당 전당대회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 여성 최초 기조연설을 들어보라. 전형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당시 '하나님이 얘기하시면 이런 목소리가 아닐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기조연설 때는 "수십년동안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했는데, 올해는 다른 게 뭔질 압니까? 바로 나 바버라 조던이 기조연설을 한다는 것입니다"라면서 청중을 휘어잡고 연설을 시작하는게 인상적이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1951년 미국의회에서의 고별 연설도 꼽고 싶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이라는 말로 유명한 연설이다. 군인이지만 아름다운 시적 표현과 기품이 탁월하다. 미국 장군들은 싸움만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계 정세와 현안에도 밝은 사람들이다. 1962년 모교인 웨스트포인트가 수여하는 실바누스 타이어 상 수락 연설에선 군인으로서의 고독감과 인간으로서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섬세할 수가 없다.
-이런 명연설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연설가가 가슴을 울리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연설가의 진심과 열정, 절박함을 청중도 절실히 느끼고 뜨겁게 호응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이 그랬다. 잘 포장된 이미지를 통해 인기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이 많은 시대에 자신의 삶과 영혼을 담아 국민을 설득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제시하려는 정치인의 연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