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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다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 (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도착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 |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혈맹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밀착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 관계도 과거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다.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은 1933년 국교를 맺은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오랜 밀월 관계와 갈등의 역사를 살펴보고 향후 양국 관계의 전개 방향을 전망했다.
미국-사우디의 밀월, 안보와 경제의 맞교환 미국과 사우디의 밀월 관계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얄타회담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5년 2월 수에즈 운하에 정박한 미해군 USS Quincy호에서 이븐 사우드(Ibn Saud) 국왕을 만나 사우디에 안보 우산을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이 원하는 저렴한 가격에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약속받았다.
당시만 해도 사우디는 부족 국가를 통합해 탄생한 신생 왕조였고, 1930년대부터 진출한 미국 업체에 주도로 석유가 생산되기 시작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기반이 취약했다. 서구 열강들이 증가하는 석유 수요를 채우기 위해 중동 지역을 향해 앞다퉈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사우디는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를 수호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였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급격히 팽창한 석유 수요를 국내 생산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국내에선 차량 수요가 폭증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산업 복원을 위해 전세계적으로 석유 수요가 크게 늘면서 신생 산유국인 사우디와의 협력이 절실했다.
다만 미국과 사우디 왕조의 걸림돌은 이스라엘의 건국 문제였다. 사우디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사우디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 영국, 사우디 3자간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결국 1951년 사우디가 요구한 '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산 무기의 대량 도입과 함께 미군 훈련사절단이 사우디에 주둔했다. 이렇게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리더인 미국과 이슬람 원리주의 전제왕조인 사우디의 밀월관계가 시작됐다.
오일쇼크로 '흔들린 우정', '페트로 달러'로 업그레이드 미국은 사우디로부터 싼값에 들여오는 석유를 기반으로 전후 엄청난 산업 발전을 이룩했고, 사우디 왕조는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안정적인 석유 수출을 통해 막대한 국부를 쌓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동전쟁으로 미국은 이스라엘, 사우디는 아랍 편에 서게 되면서 양국 관계는 큰 위기를 맞았다. 특히 1973년 4차 중동전쟁을 앞두고 아랍권은 앞선 세 차례 전쟁의 패인이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지원에 있다고 판단하고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단행하겠다며 미국을 위협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미국의 우방이었던 사우디는 아랍권 산유국들과 함께 대미 석유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사우디를 비롯해 석유자원의 무기화에 눈을 뜬 아랍권 산유국들은 차례로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고, 1973년 10월 욤키푸르 전쟁과 함께 매달 5%씩 원유 감산에 돌입했다. 그러자 당시 배럴당 2.9달러였던 유가가 무려 한달만에 12달러까지 급등했다. 그 결과 미국과 세계 경제는 오일쇼크로 유례없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의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은 서방의 메이저 석유 기업들을 제치고 석유 공급과 가격 결정권을 확보하면서 강력한 오일 패권을 쥐게 된다.
초유의 위기 상황 속에서 1974년 6월 사우디로 날아간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파이잘 국왕과 담판을 벌인 끝에 '군사-경제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은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로 제한한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군 현대화 작업은 물론 전투기 60대 등 대규모 군수 물자를 수입할 수 있게 된다. 이후 미국은 OPEC 회원국들과 동일한 협정을 맺어 '페트로 달러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사우디는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미국의 우방으로 거듭났다. 1차 오일쇼크로 한때 위기에 빠졌던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이전보다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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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1년 9·11테러로 양국 관계는 균열이 발생했다. 미국인들은 테러범 다수가 사우디 국적이며 테러자금이 이슬람 단체로부터 유입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사우디를 포함해 반이슬람 분위기가 확산됐다. 미국 정부는 이슬람 테러단체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계좌 감독을 강화했고 사우디 왕실 등에 대한 1조 달러 규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사우디에서도 반미 감정이 고조됐다. 걸프전쟁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장기 주둔하는 것에 대해 젊은층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확산돼 사우디 정권에 불안정 요인이 됐다. 미국도 아랍에서 메카와 메디나를 수호하는 성지로 여겨지는 사우디 영토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반미 테러활동의 빌미를 제공한다고 판단해 결국 2003년 사우디 주둔군 대부분을 철수시킨다.
시시각각 급변하는 이해관계 2010년을 전후로 '아랍의 봄' 혁명이 중동에서 확산되자 오일쇼크에 대한 우려로 국제유가는 배럴당 120달러를 육박했다. 금융위기 이후 고유가 시대가 도래하자 미국에선 셰일층에서 오일과 가스를 뽑아내는 이른바 '셰일붐'이 일어났다. 기존 원유 생산에 셰일 오일과 가스 생산이 더해지면서 미국은 2018년 일일 원유 총생산량이 1100만 배럴로 러시아와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됐다.
미국에서 셰일붐이 일어나자 사우디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중요성은 차츰 약화됐다. 게다가 오바마 행정부는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표방하면서 전략적 중요성이 덜해진 중동지역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은 중동에서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적대시했던 이란의 도움이 없이는 평화를 정착시키기 어렵다고 판단, 대이란 핵협상을 시도한다. 오랜 협상 끝에 2015년 마침내 향후 10년 간 이란 핵무기 개발을 동결하고 미국이 대이란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하는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을 합의한다.
미국과 이란의 핵협정이 체결되자 사우디는 이란 핵능력을 존치시키는 미국의 외교정책에 내심 불만을 품었다. 시아파의 맹주이자 이슬람 혁명을 주도하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어주고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는 것은 사우디 왕실에 큰 위협이었다. 실제로 이란은 이라크의 시아파와 민병대,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 레바본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등을 지원하는 등 사우디의 최대 안보 위협 세력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흔들리는 양국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JCPOA에서 전격 탈퇴하고 취임 후 첫 국빈방문국으로 사우디를 선택했다. 그리고 2017년에만 1100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의 무기 수출에 합의했다. 2018년에는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까슈끄지 암살의 배후로 차기 국왕인 빈 살만 왕세자가 지목됐지만 트럼프는 국내외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왕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이를 묵인했다.
트럼프는 2020년 9월 이스라엘과 UAE 및 바레인이 관계정상화에 합의하는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을 주도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개선을 바탕으로 걸프 지역 왕조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중동에서 미국의 공백을 메우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빈 살만과 사우디 왕실은 와하비즘으로 똘똘 뭉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미국이 구상했던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협력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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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다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 (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도착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실무 회담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 |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냉각 상태였다. 미국 민주당은 공공연히 행해지는 사우디 왕실의 인권 침해 문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데다 바이든 대통령도 후보 시절부터 빈 살만의 까슈끄지 암살 문제를 맹렬히 비난하며 국제사회에서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키도 했다.
바이든 정부는 출범 직후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수십년간 미국에 자국의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해 왔던 사우디 왕실에 안보 불안을 자극했다. 미국은 또 사우디가 예멘 내전을 장기화하고 있다며 일부 무기 판매를 중단하고, 후티 반군을 테러 명단에서 제외했다.
바이든 정부의 조치에 사우디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사우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투표에 기권했고, 최근에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정상 외교를 복원하면서 미국을 자극했다.
무엇보다 사우디는 미국의 원유 증산 요구를 거부했다. 빈 살만은 바이든의 전화는 받지 않고 오히려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에서 러시아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우디는 미국과 반목하는 중국과의 관계도 강화하고 나섰다. 스톡홀름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지난 2016년~2021년 중국의 대사우디 무기 수출 규모는 2.1억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140억 달러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꾸준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사우디는 중국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의 핵심 협력국인 동시에 중동 지역 최대 무역 상대국이다. 2020년 양국의 무역규모는 약 670억달러에 달한다.
사우디가 최대 원유수입국인 중국과 원유 거래에 대한 위안화 결제 허용을 검토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원유 거래의 위안화 결제가 이뤄질 경우 이는 페트로 달러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美, 중동에서 힘의 공백 허용치 않을 것" 안보와 경제를 교환하며 유지됐던 미국과 사우디의 밀월 관계는 과거에 비해 약화된 모습이 역력하다. 여러 국내외적 비판 속에 이뤄진 바이든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은 향후 펼쳐질 험난한 양국 관계의 예고편처럼 보인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라 다가올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거나 2년 후 대선에서 공화당으로 정권교체가 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은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선호해 중동에서 미국의 안보 부담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민주당의 색채는 봉건적이고 이슬람 원리주의를 고수하는 사우디 왕실과 늘 갈등과 마찰을 빚었다. 반면 공화당은 전략적으로 석유 공급을 중요시하며 중동정책의 핵심 파트너로 사우디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무기 판매를 비롯한 군사안보 협력을 강화해 왔다.
미국 정부가 전통적으로 사우디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공화당으로 교체된다면 양국 관계는 현재보다 개선될 여지가 커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유가 안정이 절실해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할 경우 사우디와 적극적인 협력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중동 문제 권위자인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의 사우디 정책이 다중적인 딜레마 상황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사우디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또 사우디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란핵합의 복원도 추진해야 한다. 메이저 석유 업체와 산유국 이익에 반하는 석유 증산과 유가 안정도 도모해야 한다. 인 교수는 사우디 왕실과 소원해진 상황에서 바이든 정부가 이런 복합한 딜레마를 해결해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인 교수는 그러나 "현재 중국·러시아와 관계개선에 나서는 사우디가 미국을 완전히 등질 수는 없을 것"이라며 "이번 사우디 순방에서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중동에서 미국의 힘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도 향후 바이든 정부의 중동정책 변화를 시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