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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도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항상 이 벤치에 앉았다. 붉은 색 바탕의 색감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고급스러운 외형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비슷한 모양의 벤치는 세계적인 축구 명문 구단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와 독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홈경기장에서도 볼 수 있다.
유럽 축구 경기장의 상징이 된 이 벤치는 독일 미텔슈탄트(Mittelstand·중견기업) 레카로(RECARO)의 작품이다. 레카로라는 브랜드는 축구팬들 뿐 아니라 자동차 마니아와 유아를 둔 부모들에게도 낯익은 이름이다. 고급 승용차의 좌석과 유아용 카시트 시장에서도 레카로의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시트(seat) 전문 회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만 회사의 이름에 담긴 탄생스토리는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다.
레카로는 1906년 빌헬름 로이터(Wilhelm Ruetter)에 의해 탄생했다. 로이터는 자신의 성을 따 사명도 로이터 카로세리(REUTTER CAROSSERIE)로 정했다. 카로세리는 독일어로 자동차의 차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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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처럼 레카로는 초기에 자동차 차체를 전문을 생산하던 업체였다. 1900년대 초반에는 자동차 엔진과 차체를 각각의 회사에서 생산하던 방식이 대세였다. 따라서 레카로는 포르쉐 등에 자동차 차체를 납품하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창업자인 로이터가 폭격으로 사망하면서 레카로의 운명도 달라졌다.
특히 1950~60년대에 자동차 엔진과 차체를 동시에 생산하는 방식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레카로 역시 위기에 직면했다. 창업자의 사망으로 추가적인 투자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 레카로 경영진은 전략적인 판단을 내린다. 1963년 차체 생산 공장을 포르쉐에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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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로의 비행기 시트 샘플 |
레카로는 2011년 또 다시 변화를 꾀한다. 레카로의 주력 사업 중 하나였던 자동차 시트 제작 부문을 미국의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 존슨 컨트롤에 넘긴 것이다. 대신 레카로의 브랜드는 계속 부착하도록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수익성이 악화된 자동차 시트 사업을 매각했지만, 브랜드 전략은 이어가겠다는 포석이었다.
2011년 이후 레카로의 주력 사업은 항공기 시트가 됐다. 레카로의 항공기 시트 분야 시장점유율은 30%대다. 전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시장 점유율이다. 유아용 카시트 역시 꾸준히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레카로는 시트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새로운 사업영역으로의 진출도 꾀하고 있다.
하르트무트 쉬르크(Hartmut Schurg) 레카로 최고브랜드&디자인경영자(Chief Brand & Design Officer)는 "경영자는 기업의 미래 지향적 방향을 제시해야 하고, 만약 그 방향이 잘못 됐을 때는 수정하는 게 혁신"이라며 "레카로는 대외환경의 변화를 기회로 봤고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 변신을 꾀했다"고 말했다.
◇레카로의 성장방정식 "핵심사업영역의 혁신"
레카로 혁신의 역사는 핵심사업영역(Main Business Domain)을 꽤 크게 움직였다는 점에서 다른 독일 미텔슈탄트의 혁신보다 통이 크다. 이는 레카로가 속한 완성차 모듈 생산업종의 성쇠를 이겨내고, 동시에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레카로의 혁신을 통한 성장은 레카로보다 훨씬 규모가 큰 오래된 전통 글로벌 기업들의 성장 공식을 따랐다.
50년이 넘는 글로벌 기업들 중 계속 성장 가도를 걷는 기업들은 대부분 핵심에 집중(Focus)→인접영역으로 확산(Expand)→사양산업에 속한 사업부의 재정의(Redefine)의 과정을 거쳐서 성장을 일궈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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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트무트 쉬르크(Hartmut Schurg) 레카로 최고브랜드&디자인경영자 |
레카로의 경우도 핵심자산인 차량용 시트를 포함한 차체 생산에 수십년간 집중해 왔다. 그러나 전쟁 중 핵심 기술자인 창업주의 폭사와 완성차 업체의 수직계열화에 의해 좀 더 핵심 사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차량용 시트에 경쟁력 강화 노력을 집중시켰다. 레카로는 포르쉐 수준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끌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을 영위하면서 얻어진 좀 더 인체공학적이면서도 비용효율적인 제품 생산역량을 바탕으로 인접 시장인 비행기 시트로 진출했다. 레카로는 이 과정에서 움직이는 교통 수단에 부착돼 인체에 편안함을 주는 시트 디자인과 경량 제작 역량이라는 핵심 역량을 갖추게 된다. 공정혁신을 이끌어낸 것이다.
아울러 레카로는 그들의 핵심 사업을 B2B 시트모듈 제공 사업에서 모든 운송수단에 접목 가능한 시트 제공업체로 비즈니스 모델을 재정의한다. 이 재정의의 결과가 B2C 비즈니스인 어린이용 카시트 사업 진출이다. 무엇보다 미래 고객인 어린이들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전략적 판단도 두드러진다.
B2C 시장 진출과 더불어 브랜드력이 필요하게 된 레카로는 축구광들의 사회인 유럽에 가장 효율적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프리미어 리그, 분데스 리가 등 주요 축구경기장에 선수 및 감독석에 자신들의 의자를 배치한다. TV카메라의 집중도가 높은 곳에 배치하여 자연스럽게 간접광고 효과를 노린 것이다. 수요혁신의 과정으로 풀이된다.
베른트 가이저(Bernd Gaiser) 레카로 최고조직개발&재무책임자는 "최근 독일 미텔슈탄트의 성공 방정식은 브랜드 강화와 맞닿아 있다"며 "회사의 브랜드를 알리는 것이 회사의 가치가 되는 시대이고, 이에 따라 레카로도 전략적으로 브랜드를 강화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