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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CE 전경 |
NDF의 창업자들은 네덜란드 최고의 첨단기술 산업단지인 하이테크캠퍼스에인트호벤(HTCE·High Tech Campus Eindhoven)으로 달려갔다. HTCE에 있는 125개 기업과 1만 여 명에 달하는 연구 인력 중 아이디어 실현을 도와줄 전문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NDF의 요청으로 전문가들의 회의가 즉각 소집됐고, 관련 기술 기업 10여 곳에서 대표 기술자들이 모였다. 자기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문제를 푸는 회의였지만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결국 하루 만에 아이디어를 사업화 할 수 있는 솔루션과 비즈니스 모델이 나왔다.
협업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글로벌 강소기업들을 배출해 내고 있는 네덜란드는 단순한 산업 클러스터가 아닌 '혁신 클러스터'를 산업의 인프라로 갖추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혁신클러스터인 HTCE는 지적재산권의 공유를 통해 지속가능한 혁신의 산실이 되어 네덜란드의 산업 발전을 이끌고 있다. 나아가 진화된 '밸류스틱'(Value Stick) 혁신을 실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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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CE 단지 개념도 |
LED라는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의 출현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두 창업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우선 그동안 열심히 관리해 왔던 고객사의 구매 담당자나 엔지니어들을 부지런히 만나 NDF의 기술력을 활용할 수 있는 신사업 분야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했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들을 들고 HTCE를 찾아가 솔루션을 찾았다.
결국 NDF는 지난 2012년 기존 LCD 백라이트 기술에 LED 기술을 더해 에너지 효율이 높으면서도 안정적으로 다양한 조명 색깔을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NDF의 혁신은 2013년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혁신 단지'인 HTCE의 저력을 증명해 주는 사례다. 코엔 반 웨스트인데 NDF 대표는 "아이디어와 자신 있는 핵심 기술 한 가지만 있으면 사업화에 필요한 다른 기술들은 HTCE에서 실시간으로 확보할 수 있어 혁신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HTCE는 지난 1998년 필립스의 첨단 R&D(연구개발) 집중 시설로 문을 열었다. 필립스는 이곳에서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보다 내부 지식자원을 외부 기업들과 '공유'(inside-out)하고, 에인트호벤대학 등 인근 대학 연구소 등과 교류하며 중장기 R&D 방향을 설정하거나 인적자원을 '확보'(outside-in)해 왔다. 이른바 '양방향 오픈 이노베이션'이다.
HTCE는 지난 2012년 네덜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인 마르셀 보에크호은(Marcel Boekhoorn)이 이끄는 투자회사 샬레그룹(Chalet Group)에 인수된 뒤에도 이같은 양방향 오픈 이노베이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샬레그룹은 HTCE의 전세계 60여 개국 1만 여 다국적 연구 인력을 종횡으로 엮어 연구부터 창업, 사업화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주기를 밀착 지원하는 '혁신 배양 기지'(Petri dish)로 만들었다.
HTCE는 단지 내 입주 기업들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 대학 연구소 등이 어우러진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매년 40~50개에 이르는 혁신 솔루션들을 지적재산으로 만들고 있다. 입주 기업들 모두가 이를 공유하며 각자의 사업 개발에 적극 활용, 무한한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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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CE의 한 실험실 모습 |
반면 혁신클러스터는 동종 산업뿐 아니라 이종(異種) 산업까지 아우른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대학 연구소, 금융기관까지 복합적으로 모여 규모가 큰 혁신을 이끈다. 동종과 이종 업계를 가리지 않고, 기업의 규모도 상관없이 영역을 넘나드는 사고로 창의적 혁신을 이뤄내는 것이 목표다. 또한 금융·마케팅 서비스까지 주변에 근접해 있어 상업화도 빠르다. 나아가 결과물은 다시 미래 혁신을 위한 지적 자극으로 이어진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이미 지난 2001년에 내린 개념 정의다. 정부나 지자체 주도로 형성되고,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R&D가 중심이 되어, 수평적 협업 보다는 단계별 협력 관계나 기업 간 경쟁에 익숙한 한국 산업단지의 현실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있다.
네덜란드 정부 출연 R&D 기관인 TNO그룹의 박병훈 한국대표는 "HTCE는 한국의 세운상가에서 손만 들면 많은 기술자들이 달라붙어 도와주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며 "게다가 단지 안에 대기업과 연구소, 투자기관, 마케팅 서비스 기관이 함께 상주하고, 건물도 예술적이라고 상상하면 딱 맞아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혁신클러스터가 잘 운영되면 밸류스틱의 혁신이 더욱 가속화되고, 규모도 커진다. 기술 기반 벤처를 예로 들면 애초에는 꿈도 꾸지 못할 고가의 실험장비, 프로토타입 생산 장비 등이 최신식으로 구비되어 저렴하게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필요한 부품과 기술은 원스톱으로 조달 받을 수 있고, 제품과 서비스 등을 업그레이드할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다. 잘 갖춰진 인프라만으로 공정혁신과 공급망 혁신이 가능한 셈이다.
벤처기업들은 단지 내 인접한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시장 개척에 필요한 내용을 멘토링 받을 수 있다. 반대로 글로벌 기업이나 중견기업들은 벤처기업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자신의 제품과 서비스, 솔루션 등에 접목해 더 큰 시장을 창출하는 수요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다.
HTCE는 이런 프로세스를 통해 필립스가 내놓은 개인용 신체 관리 애플리케이션, 쌍방향 TV를 실감나게 구현해주는 차세대 스크린, 파킨슨병 치료에 쓰이는 뇌 자극 기술 등의 토대를 만들었다. 여러 작은 혁신기업들이 HTCE의 인프라를 통해 아이디어를 내고, 최종적으로 글로벌 기업이 시장의 물꼬를 텄다.
이 기술들은 공동의 지적재산이 된다. 작은 기업이 스스로 모든 과정을 해내려고 했다면 '죽음의 계곡'(창업 후 성장을 못하고 사라지는 단계)을 넘지 못했을 지도 모를 아이디어가 큰 바다로 살아나간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 단위에 머무른 수요 혁신이 아닌, 아예 새로운 블루오션을 창출한다. 밸류스틱에서 가격(price)을 '최고지불용의가격'(Willingness To Pay)로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WTP 자체를 새로 쓰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