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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노벨과학상을 많이 받은 진짜 이유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 전문가 칼럼 -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강철구 | 2023.10.08 05:30

편집자주 |  머니투데이 지식·학습 콘텐츠 브랜드 키플랫폼(K.E.Y. PLATFORM)이 새로운 한주를 준비하며 깊이 있는 지식과 정보를 찾는 분들을 위해 마련한 일요일 아침의 지식충전소 <선데이 모닝 키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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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구 교수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은 한국 입장에서 볼 때 고산준봉(高山峻峯)을 방불케 할 정도로 높이 솟아 있다. 실제로 자신들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책에서도 일본은 자신들이 아시아에서 서구식 과학기술을 건설한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할 정도로 자신감도 강하다. 이러한 자신감의 근거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 일본 과학계를 이끈 지도자들의 열정과 이를 실행하고자 했던 관료들, 그리고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연구자들로부터 출발한다.

일본이 과학기술에 국가적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열강들의 식민지 지배 과정을 지켜보면서 일본이 그렇게 당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부국강병이 절대적이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지배할 만한 군사력도 결국은 고도의 과학기술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서구의 과학기술을 무수정 도입한 후 국가가 주도하여 이를 응용하고 개량하는 과정을 거쳐 일본화하는 것이고, 그다음 이를 철저히 분석하여 원천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시아 최초로 근대국가에 진입하고는 열강 국가에 편입한 후 한국을 식민지지배하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으키면서 전쟁이 끝난 후의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여 '학교졸업자사용제한령'(1938.8)을 공포하여 문과계 학생들은 전쟁터에 보냈지만 이공계 학생들 대부분은 징용을 면제해 주었다.

태평양 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군인 출신으로 포츠담 선언 수락 당시 총리였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 1868~1948)는 일본의 패배를 '과학전의 패배'라고 했다. 당시 일본 지도부에서도 패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일본 과학의 낙후로 분석했다. 1945년 10월 20일 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는 필리핀에서 포로가 된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대장이 미국 기자가 패배 원인을 물었을 때 영어로 'science'라고 외마디를 외쳤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은 기술 입국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 '제철 보국'을 외쳤듯이 일본 역시 '기술 보국'을 외쳤다. 패전 다음 해인 1946년 전쟁에 대한 학자들의 책임 추궁이 시작되었지만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 역사와 지리, 철학, 농업 분야의 학자들에 국한하였을 뿐 자연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흔한 농담 중 하나가, 미국은 전문 직종인 구성비가 변호사 9인에 엔지니어 1인이라고 하지만, 일본은 엔지니어 9인에 변호사 1인이라고 할 만큼 기술을 강조하고 기술자를 대우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한국은 어떨까. 이공계나 기초과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R&D(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2022년 기준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한국이 4.96%로 이스라엘 다음의 2위인데, 일본은 OECD 평균인 2%에도 못 미치는 1% 전후에 불과했다.

인구 1000명당 연구원 수 역시 세계 1위로 일본보다 많다. 과학기술 분야 논문은 연간 6만 편이 나온다. 일본은 약 10만 편으로 우리보다 많지만, 인구는 2.5배 많고 경제 규모는 우리의 세배에 달하는 일본과 상대적으로 계산해 보면 우리가 많은 편이다. 최소한 데이터만 보면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주요 OECD 국가들에 비해 결코 과학 연구와 관련한 정량 평가는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 점을 필자가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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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우리나라의 R&D는 D인 개발비, 즉 산업계의 응용 분야와 기술 개발에 집중되어 왔고, 일본은 R인 리서치, 즉 기초 과학에 집중해 지원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고도성장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국가 경제 개발에 도움되는 응용 연구에 집중하는 개도국형 모델을 선택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당장 수출을 우선하는 제품 생산에 도움이 될 만한 응용 기술 개발에 집중해야 하다 보니 기초 연구나 이론 연구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기초 연구 투자 비중은 2006년 23.1%에서 2016년 39.0%로 증가했고, 또 2008년부터는 기초 연구비가 응용 연구비를 추월했다. 그런데 기초 연구비의 세부 항목으로 들어가면 아쉬움이 남는다. 순수 기초 연구비가 30%, 목적 기초 연구비가 66%에 이른다.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는 비율보다는 정부가 목적을 갖고 계획한 연구프로젝트에 '고용'되어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 과학자들은 자신이 국가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하청 업체와 같다고 불만이 높다.

이제는 기초과학, 순수과학에 투자해도 될 만한 분위기와 환경, 그리고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이렇게 다르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기초 과학에서의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둘째, 한국의 입시 현황에서도 문제가 드러난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면서 대학이 구조조정을 할 때에도 자연과학을 담당하는 이과를 폐과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지방대의 경우 물리학과나 수학과, 화학과 등은 벌써 없어진 지 오래다. 최근 3년간 서울대 이공계 학생과 카이스트 학생 중 15%가 의·약대에 재입학하기 위해 자퇴를 했다고 한다. 2023년 입시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소위 'SKY'로 불리는 한국 최상위 대학의 정시 모집에 합격한 약 4660명 중 28.8%에 해당하는 1343명이 등록을 포기하고 의학 계열로 지원했다.

정부는 2023년부터 반도체 특성화 대학 8곳을 선정해 540억 원을 지원하고, 이들 대학에서 매년 400명 이상의 반도체 우수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지만, 똑똑하다는 인재들은 '의치한'(의대, 치대, 한의대)으로 몰린다. 서울대 물리학과보다 지방 촌구석에 있더라도 의대가 더 인기가 있다.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나와도 의대, 과학고를 나와도 재수해서 의대, 전국에 있는 '의치한'을 다 채우고 나야 그 다음 서울대 공대의 빈자리를 메꾸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의치한을 졸업한 수재들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을 만큼 연구에 몰두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0.1%의 의대 진학자들이 압구정동 성형외과 골목으로 진출하려고 하지 결코 의학이나 생리학의 연구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의밸상'(의사배출상)이 있다면 우리나라가 당연히 수상할 것이라는 자조적(自嘲的)인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기초 과학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지 않고는, 또 이공계 출신이 사회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국민들 간에 형성되지 않고서는 기초 과학의 중요성은 한낱 구호에만 머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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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과감한 연구비 투자다. 기초 과학에서는 특히 자본의 투입이 중요하다. 2002년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 2002년 수상)와 가지타 타카아키(梶田隆章, 2015년 수상) 교수는 일본 기후현(岐阜?) 가미오카 광산(神岡?山) 지하 1000m에 설치된 지름 39.3m, 높이 41.4m의 초대형 실험 시설에 5만t의 물을 담고 있는 '슈퍼 가미오칸데'를 활용하여 중성미자의 질량을 발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지하 1000미터 지점에 설치한 이유는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방사선의 간섭 없이 물리 현상을 관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20년에는 8000억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하이퍼-가미오칸데'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슈퍼 가미오칸데보다 더 큰 검출 시설로, 지름 74m, 높이 60m의 거대한 탱크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이 탱크에 불순물을 제거한 26만t의 물을 채우게 되면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할 수 있어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소위 '장비빨'이 받쳐줘야 연구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우수한 연구 결과는 대부분 연구 장비, 그리고 분석 도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기초과학은 개인의 연구 분석에 한계가 있어서 정부나 대학 등의 기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설비투자를 통해 기초과학도 튼튼해지고 노벨상도 받는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일본도 처음부터 기초과학에 올인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방향을 초기 과학기술자들이 방향을 잘 다져 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넷째, 과학자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문제다. 다카미네 조치키(高峰?吉, 1854~1922)가 일본 노벨상의 산실인 리켄(이화학연구소)의 설립(1917) 모임에서 강조했던 스피치를 되돌아 보면 실감이 난다.

"일본의 폐단은 너무 조급하게 성공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응용 연구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죠. 반드시 순수 이화학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이게 1917년 당시의 발언이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1907∼1981)가 중간자의 존재를 연구해 1949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을 때의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도 일본의 과학계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진정으로 일본 과학의 발전을 기뻐하고 한층 더 높은 진보를 원한다면, 일반 과학자들의 생활 문제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기초과학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이 생활 문제로 연구를 포기하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자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의 중요성을 빗대어 부탁한 말이기도 하다.

노벨상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의 금메달과 다르기 때문에 과학자를 운동선수처럼 압력을 가해서 단시간에 끌어올릴 수는 없다. 그런데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시류에 민감하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 주목을 받게 되자 갑자기 '2020년까지 AI(인공지능)에 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 그 사업은 망한다고 한다. 왜냐면 정부가 투자를 했다는 건 한국 정서상 단기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연구 풍토는 결국 오랜 시간과 끈기를 요구하는 기초과학을 후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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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일본계 미국인 마나베 슈쿠로
반면 일본은 특유의 장인 정신과 특정 분야에 몰입하는 풍토가 있다. 맡은 분야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태어나고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길이라는 생각과 여기에 더해 자신의 관심 분야에 몰입하는 오타쿠(オタク) 문화가 맞물려 한 우물을 파는 연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천재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들여 집중력을 발휘하는 과학자들이자 정규분포를 벗어난 오타쿠들이 대부분이다.

2002년에 학사 출신의 회사원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가 노벨화학상을 받은 것은 끈질긴 탐구 정신으로 학력의 벽마저 넘어선 케이스다. 석박사 학위도 없는 그가 노벨화학상을 받기까지는 회사도 한몫한다. 다나카가 근무한 시마즈제작소(島津製作所)는 연구원들이 하고 싶은 연구 테마나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주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또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묻지 않는 회사로 유명하다.

야마나카 신이 교수(山中伸?, 2012년 수상)는 또 어떤가.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로 국제학술계에서 주름잡을 때만 해도 변방의 무명 연구자였다. 그러나 결국 이 분야에서 황우석 박사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신이 교수는 꾸준히 연구를 지속해 온 결실을 인정받아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2014년 수상)는 대학의 교수나 대기업 연구소 출신도 아니다. 지방의 중소기업에 불과한 일본 니치아화학(日?化?工業株式?社)에서 근무 중 1990년 청색 LED 소자 개발 후 상용화까지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때의 연구가 근간이 되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LED 조명이나 TV, 스마트폰이 가능해진 것이다. 연구자도, 기업도, 국민도 모두가 진득하게 기다려 준 덕분이다.

오무라 사토시(大村 智, 2015년 수상) 명예교수 역시 장인 정신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흙 속의 미생물을 모으기 위해 늘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연구를 게을리하거나 교만해지지 않고 여전히 장지갑 속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든다. 언제 어디서든 토양의 샘플을 곧바로 채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두들 남의 시선을 그다지 개의치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상을 받든 안 받든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 나가는 연구자들의 우직함이 이렇다. 그 누구도 연구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재촉하거나 논문 조작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저 내가 하는 연구이니 결과를 낼 때까지는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는 자세를 유지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교수들의 연구비가 많은 것도 아니고, 연구 환경이 좋다고 만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저 정시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친구도 없이 단조롭게 연구만 한다. 과학자의 과학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 그리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연구 활동에만 전념하는 프로 정신을 갖고 있을 뿐이다.

국가 경영이나 정치 성향을 드러내고 발언하는 경우도 좀처럼 보기 힘들거니와 교내 정치에 휘말리거나 관심을 갖는 교수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회의가 있을 경우 우리나라는 식사를 겸해서 하거나 스낵과 커피는 기본적으로 제공하지만 일본은 일절 없다. 내 돈 내고 사 먹기 전에는 물 한 모금도 제공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또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아내가 만들어 준 '벤또'(도시락)를 들고 오거나 자신이 편의점에서 사 온 빵과 음료수를 갖고 와서 주변 아랑곳하지 않고 꺼내 놓고 회의한다.

회의가 끝나면 자투리 시간에 수다를 떨지도 않는다. 조용히 자기 연구실로 들어가 연구에 전력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수가 도시락 싸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꺼내 놓으면 아마 좀생이처럼 보인다며 뒷담화가 오고 갈 수도 있지만, 일본은 전반적으로 우리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어릴 때 꿈이 과학자라고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이런 꿈은 물거품이 되는 나라가 현재 대한민국이다.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 가르치는 암기해야 할 과목이 어린 청소년들을 짓누르기 때문에 창의적인 사고나 꿈을 펼칠 '시간'이 없다. 이렇게 되면 똑똑한 인재는 늘어나지만 창의적인 인재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오죽하면 한국에서는 수학도 암기 과목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공교육이 무너진 이런 교육 시스템은 확실한 결과물은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창의성을 길러낼 수 없다. 고3 때까지 수능에 목숨을 거는 교육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창조력이 저하된다. 창의력이 발휘될 나이에 모두가 입시에 '몰빵'하기 위해 전전긍긍 학원을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초중고는 입시 학원이고, 대학은 취업 학원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스스로 공부하고 고민하는 근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분명히 바꾸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지금까지는 따라가는 과학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앞서가는 기초과학 강국이 되어야 한다. 철학이 물리학의 베이스가 되었듯 당장은 돈도 안 되고 왜 하는지 모르게 보일지언정 앞으로 기초과학을 무시해서는 우리는 영원히 '넘버 투'에 머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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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현재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미국적 취득자 3명 포함 29명으로, 노벨경제학상 외에는 전 분야에서 골고루 노벨상을 배출했다. 평화상 1명, 문학상 3명을 제외하면 25명이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우리나라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였다는 공로였다. 이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한국의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전 나라가 떠들썩하였던 기억마저 이제는 아련할 뿐, 23년이나 흘렀지만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아직까지도 수상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한일 축구에 비유해서 29:1이라고도 표현하지만 노벨상이 과학의 성취 수준을 평가하는 표준도 잣대도 아니니 너무 자존심 상할 필요는 없다. 또 일본과 한국의 과학기술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노벨상 수상 실적만 놓고 스포츠 경기 비교하듯 말하는 것도 적절치는 않다. 오히려 이것이 독이 되어 '노벨상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기만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유행어가 있다.

"싸움에서 지는 것은 분한 일이지만 승자에게 배우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인들은 매년 10월만 되면 유독 심하게 노벨상 몸살을 앓는다. 이웃 나라 일본의 노벨상 수상은 아직까지 한 번도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 경력이 없는 우리나라에는 분명 큰 자극제이다. 그렇지만 노벨상 수상이 곧바로 국력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도 특히 일본이 수상자를 낸 해에는 몸살이 더 심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과학기술의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에 메달 수가 적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다고 과학기술이 저절로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양에서 질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탁상행정이 아니라 실행 가능성 높은 제도의 정착이 중요하다. 시간을 두고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지속 가능하며 일관성 있는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일본은 적어도 단기간에 걸친 국책 사업이나 행운으로 기초 과학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170여년 이상의 시간의 축적의 결과가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이공계를 기피하는 국민 의식 등이 개선된다면 가능성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국가와 기업, 그리고 연구자가 일체된 모습을 보일 때 빛이 날 것이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실패는 우리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지속성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정부도, 관료도, 국민도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대한민국이 물리학에 대한 깊은 인식과 화학의 신비로움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나아가 과학자들이 꾸준히 한 가지 주제로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낼 때까지.